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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그 천 년의 영기靈氣를 읽다

삼차원 입체물인 조각품을 이차원 평면인 사진으로 표현하려는 시도는 흔히 작품의 겉모습만을 보여주는 헛수고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촬영 각도와 조명의 강약에 따라 천변만화하는 조각상의 세밀한 표정을 모두 잡아내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더구나 오묘한 표정과 우아한 자세로 신비로운 정신 세계를 표현해낸 사유상(思惟像)이라면 그 어려움은 더욱 클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한국국제교류재단에서 새로 발간한 『Eternal Images of Sakyamuni』라는 철학적인 제목을 단 책은 우리가 세계미술사에 크게 공헌한 작품으로 자부하는 두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사진과 글을 통해 새로이 해석한 점이 돋보인다. 30여 년 넘게 국립박물관에 재직하며 불교조각 연구에 평생을 바친 강우방 선생과 역시 우리 문화유산 촬영에 일생 매진해온 한석홍 선생의 합작품이다.

모든 생명이 어두운 혼돈에서 탄생하듯 두 걸작 사유상은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나는 보석처럼 검은색 종이 위로 홀연히 화생한다. 역광을 받은 오묘한 실루엣으로, 측광을 받은 놀랍도록 사실적인 표면 질감으로, 때로는 미묘한 피부의 양감으로 우리 눈앞에 나타난다. 인간의 눈으로 미처 잡아둘 수 없었던 순간을 카메라의 눈을 빌려 재현해낸 것이다. 두걸작을 한눈에 비교하고 감상할 수 있도록 면밀한 계획하에 촬영과 편집이 이루어졌음을 지면을 통해 감지할 수 있다. 편집자의 의중을따라 책장을 넘기다 보면 전체에서 부분으로, 윤곽에서 표면의 질감까지 천 년 전 사유상을 만든 위대한 조각가들의 손길을 하나하나 체험하게 된다.
책의 말미에는 사유상 연구에 진력해온 강우방·이정희 두 선생의 짧은 에세이가 붙어 있다. 두 학자가 사유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사뭇 다르기에, 사유상이 내포하는 양식적·도상학적 측면의 다양한 해석을 엿볼 수 있다.
간다라에서 중앙아시아 그리고 중국을 거쳐 한국, 일본에 이르기까지 사유상 조성의 궤적을 역사적·도상학적 관점에서 탐구한 이정희 선생은 사유상이 싣다르타 태자, 관음, 문수, 미륵 등 다양한 신격으로 조성되었음을 지적했다. 그중에서 미륵사유상은 한국에서 탄생하여 일본으로 전해진 도상임을 주장하며 한국 사유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강우방 선생은 삼국시대 한국의 사유상은 근본적으로는 싣다르타 태자상이었으나 석가여래가 열반함에 따라 지속적인 경배대상으로 미륵여래가 설정되었으며, 미륵여래는 싣다르타태자(석가 보살)에 대응하는 미륵보살로 변모하였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리고 한국에 이르러서 비로소 불전의 주존으로 봉안된 매우 중요한 신격임을 주장한다. 또한 국보 78호 일월식 보관 사유상과 국보 83호 연화관 사유상이 시기적·양식적으로 계통이 다르며, 표현 방식도 상이함을 강조했다. 즉, 78호 사유상은 중국의 북위ㆍ동위 양식처럼 선적(線的)이고 장식적(裝飾的)이며, 83호 사유상은 인도의 굽타 양식을 이은 북제 양식에서 연원하여 입체적이고 간결한데, 이같은 양식 차이는 78호 상이 6세기 후반 고구려에서, 83호상이 7세기 전반 백제에서 제작된 것으로 귀결된다고 언급했다.



사실 두 사유상에 대한 새롭고 흥미로운 이야기는 책의 앞부분에 실린 도판 해설에서 더욱 자세히 찾아볼 수 있다. 편집자인 강우방선생은 최근 고구려 고분벽화로부터 조선시대 괘불에 이르기까지, 중국 전국시대의 동경과 그리스의 기둥 장식에 이르기까지 시공을 넘나들며 미술에 나타난 기(氣=靈氣)의 표현을 탐구한다. 영기를 표현한 문양(=靈氣文)은 고정되지 않으며 용, 불꽃, 넝쿨, 연꽃, 구름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영기는 생명의 원천인 물에서 탄생하며 이로부터 모든 형태가 화현한다(=靈氣化生). 앞의 두 사유상도 영기로부터 탄생했으며, 사유상은 또다시 새로운 생명의 싹인 영기를 발산한다. 두 사유상은 제작 시기, 국가, 양식 등이 상이하기때문에 영기 표현도 상이한데, 78호 상은 주로 보관, 천의, 옷 주름, 장신구 등에서 영기를 발산하며, 83호 상은 주로 몸 자체로 프라나, 즉 영기를 발산한다. 78호 상에서는 선(線)을 통해 기를 표현했다면, 83호 상에서는 괴체(塊體)를 통해 기가 발현된 차이가 있다.
기(氣) 또는 영기(靈氣)는 눈에 보이지 않기때문에 실체가 있는지 여부도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예로부터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기의 존재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으며, 미술가들도 생동하는 기운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이제 모든 미술에 생명 탄생의 근원체인 ‘영기’와 그 구현체인 ‘영기문’이 표현되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새로운 시도가 우리 미술연구에 아름다운 자양분이 될 수 있을지 자못 기대가 된다.